여러분, 저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식이장애와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유학 간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할 겸 영국에 4주 정도 머물렀는데요.
그런데, 12월 마지막 날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던 날, 아빠에게 뜬금없이 메시지가 왔습니다.
한국과 영국의 시차는 8시간이니, 한국은 밤, 영국은 이른 오후쯤이었겠네요.
“엄마와 해돋이 여행을 왔는데, 엄마가 사라졌다”
아직도 그때의 놀람이 잊히질 않아요. 너무 놀라서 친구에서 전화를 했고, 받자마자 우는 바람에 친구도 놀라서 숙소로 달려왔어요.
아빠는 함께 저녁을 먹다 말다툼 때문에 화가 난 엄마가 핸드폰만 챙겨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했어요.
알고 보니 엄마는 버스를 타고 홀로 서울로 돌아간 것이었고, 잠깐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끝나지 않은 일이었죠.
엄마는 아빠가 연락했냐며 미안하다고 했고, 아빠는 엄마가 자신과 말을 안 한다며 푸념을 했어요. 저는 영국에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했냐고요?
잠잠했던 폭식이 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식이란 단순히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마치 누가 먹으라고 조종하는 것처럼 통제할 수 없는 조절 불가능한 상태에서 마구 먹는 것을 뜻합니다.
왜, 저는 그 상황에서 폭식을 했을까요?
아빠에게 그만하라고 하거나 엄마와 아빠를 중재한 것도 아니고, 대신 마트에 가서 보이는 대로 과자를 사서는 홀로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매우 뜬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동들을 하고 있답니다.
이 순간을 피하고 싶어요!
흔히 현실도피 라고 하는 심리적 철수는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방어기제의 일종입니다.
방어기제란 우리에게 주어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여러 스트레스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행동입니다.
그 중 철수 및 도피는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결하기보다는 상황을 회피해버리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자려고 한다거나 갈등하다 말고 뜬금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예로 들 수 있답니다.
여러분은 어떤 회피 행동을 하고 있으신가요?
시험 기간에 공부가 하기 싫어서 압박감과 불안감은 느끼면서도, 원래 잘 하지도 않던 게임에 빠지거나 별 관심도 없던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던 경험, 혹시 있으신가요?
이 모든 행동이 회피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 현실 도피 행동을 모두 나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적절한 회피 행동은 환기도 되고, 그 나름대로 하루의 즐거움을 주기도 하니까요. 불안감을 가득 안고 보는 드라마만큼 재밌는 것이 없죠.
혹시, 여행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 들어보셨나요?
크게 보면 여행도 하나의 도피에 해당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과한 것은 문제가 됩니다.
과제 하기 싫은 마음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 부모님이 싸울 때 무력감에 사로잡혀 과자 한 봉지쯤은 먹을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어 정작 해야 할 것을 못하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폭식한다면, 위험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피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피한다면 정작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회피 행동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도망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굉장히 쉬운 해결책 같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죠.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다음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 짓는 것입니다.
저는 왜 부부싸움을 한 엄마와 아빠를 두고 영국에서 홀로 폭식을 했을까요?
그 당시 굉장한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력감에는 내가 개입을 했더라면 부모님이 싸우지 않았을 거라는 통제감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했다고 생각하니, 무력감과 죄책감에 빠져 폭식을 한 거죠.
혹시, 여러분도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 너무 버겁고 겁이 나고, 어디서부터 헤쳐나가야 할지 몰라 막막한 마음에 음식을 찾고 있다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제쳐두고요. 어디까지 도망갈지 한계점을 정해놓는 것도 좋아요.
눈앞에 있는 산이 너무 커보여서 암담하고 막막할 때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 다음 산을 넘을 때는 조금 쉬워지고, 또 그 다음에는 더 많이 쉬워질 테니까요.
책 <또 먹어버렸습니다> 중에서
※칼럼제공: 누다심센터 김윤아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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