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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몸의 밀당 승부


믿기 어렵겠지만 순수하게 이론적으로만 따진다면 당신의 몸에는 평균 한 달치 분량의 비상식량이 숨겨져 있다. 물론 체내에서 합성할 수 없는 수분과 비타민, 미네랄 정도는 추가로 섭취해 줘야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믿기 어렵다면 직접 계산해 보자. 체질량 지수는 피트니스 업계나 비만 클리닉에서 건강한 여성 평균으로 제시되는 20%로 놓고, 체중은 중키의 여성 평균 체중인 50kg에서 55kg으로 잡아보자. 이런 체구를 갖고 있다면 몸에 15kg 안팎의 지방 덩어리를 갖고 있기 마련. 이걸 모두 에너지원으로 돌려보자. 지방 1kg을 분해하면 대략 7600~8000kcal의 에너지가 체내에 공급된다. 같은 체구의 여성이라면 일일 기초대사량은 하루에 1400kcal 전후. 이를 고려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고 있다면 몸에 있는 지방 1kg을 분해하는 것만으로도 5~6일 정도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15kg이면 단순 계산으로 따져봤을 때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석 달도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는 사람이 누워서 숨만 쉬고 살 수는 없다. 움직일 때 사용되는 활동대사량도 고려해야 하고 앞서 말한 수분 보충이나 비타민, 미네랄 같은 미량 영양소 공급의 문제도 있으니 무작정 굶는 건 위험하다. 그래도 우리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그리고 잘 굶고 버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는 빙하기가 찾아온다면 정말 비축해 놓은 체지방을 비상식량 삼아 오래 버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비행기 추락이나 표류 등의 조난 사고로 음식이 없는 극한 환경에서 여러 날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의 체험담이라든지 종교적 신념이나 사회적 운동 목적으로 단식투쟁에 들어간 사람들의 사례담을 취합해 봐도 대략 비슷한 추이를 보인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몸에 대략 한 달 정도는 굶고 버틸 수 있는 지방량을 ‘비상식량’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론 겨울잠 자는 동물처럼
이런 비상식량을 잘 활용하는 모범 사례(!)는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을엔 일부러 실컷 먹어서 몸을 최대한 불리고 겨울이 다가오면 굴을 파고 숨어들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잠을 잔다. 잠을 자는 기간에는 자연히 사냥이나 먹는 활동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겨울잠 기간엔 뱃살로 쌓아뒀던 비상식량에 의존해 살아간다. 이렇게 겨울을 나고 따뜻한 봄날이 오면 고개를 내미는 동물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핼쑥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는다면 옆구리의 비상식량이 에너지로 분해돼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다이어터라면 다들 한 번쯤 굶어봐서 알겠지만 이론과 실제는 매우 다르다. 왜 내 몸은 언젠가 써먹겠다며 이렇게 많은 비상식량을 옆구리에 쌓아두고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걸까?

굶는다고 무조건 살이 빠지는 건 아니다
솔깃한 현상이지만 이 비상식량은 내 맘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생사가 오갈 정도의 극한 상황이 아닌 이상. 물론 굶으면 살이 빠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하루나 이틀 굶었다고 ‘한 끼 굶을 때마다 체지방 몇 그램’ 하는 식으로 비상식량(체지방) 전환 스위치가 켜지지는 않는다. 단식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정말 일주일 이상 처절하게 굶었을 때야 서서히 허리둘레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몸은 옆구리에 끼어 있는 비상식량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정말 벼랑 끝에 몰리지 않고서는 에너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정말 위험할 때까지 쓰지 말고 남겨두라고 몸과 지방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존재라도 있는 걸까? 대체 그 엄격한 감독관의 정체는 뭘까? 바로 ‘이기적인 뇌’다.

이기적인 뇌와 굶주린 몸 사이의 줄다리기
뇌는 몹시 이기적인 기관이다. 뇌가 우리 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체중이나 체적으로 환산하면 3%가 되지 않지만 몸에서 소모하는 에너지의 약 20%를 혼자서 독차지한다. 근육보다 에너지 효율이 7배는 안 좋은,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기관이다. 그러나 이 이기적인 행태는 사실 타당하다. 근육이 줄어들거나 소화기관이 잠시 멈춘다고 해서 사람이 당장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뇌가 멈추는 순간 인간은 금방 생명 활동에 타격을 입는다. 뇌는 심장이나 폐와 같이 생명유지를 하는 기관들을 지배하는 몸의 영순위 기관으로, 에너지 공급 순위에서 최우선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뇌의 에너지 소모 행태는 몸 안에서 다른 기관들(근골격계, 소화기, 호흡기 등)과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음식을 먹어서 얻은 에너지는 한정돼 있는데 제한된 열량을 최대한 많이 나눠 가지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는 형상. 그중에서도 뇌는 압도적인 승리자다. 심지어 자기에게 이득이 되기만 한다면 같은 몸에 있는 식구들의 에너지를 빼앗거나 해를 입히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다!

이런 생리학적 현상을 두고서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선 ‘이기적인 뇌(Selfish Brain)’라는 표현이 떠오르고 있다. 뇌와 뇌를 제외한 몸의 나머지 부분 사이에서 에너지를 놓고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음식을 통해 섭취된 에너지를 뇌가 끌어다 쓰는 걸 ‘뇌 당김’이라 부르고, 반대로 몸이 에너지를 끌어다 쓰려는 힘을 ‘몸 당김’이라 부른다. 그리고 어느 쪽이 이겼느냐에 따라서 다이어트의 성패가 결정된다. 이 ‘이기적인 뇌’ 이론에 의하면 다이어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이상한 현상들을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비상식량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몸속에 한 달 가까이 굶고도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지방으로 저장하고 있다면, 사실 며칠쯤 배가 고프지 않아야 정상이 아닐까?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인즉슨 에너지가 부족하므로 보충해 달라는 비상 신호다. 그런데 몸은 비상사태 때 쓰겠다고 이미 에너지를 저장해 놓고도 왜 계속 배고프다고 아우성일까? 이것이 이기적인 뇌 이론을 주장하는 생리학자들이 말하는 ‘뇌 당김’의 대표적인 예시다. 뇌는 몸의 에너지 상태와 무관하게 오로지 자기한테 공급되는 에너지량만 계산해서 몸에 신호를 보낸다. 이미 점심과 달콤한 식후땡 간식이 들어간 뒤라도, 아니 심지어 무언가를 먹고 있는 와중에도 뇌가 느끼기에 부족하다 싶으면 무조건 더 먹으라는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런 작용의 근원에는 뇌의 특이한 습성이 있다. 뇌는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편식한다. 뇌는 3대 영양소(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가운데서도 유독 탄수화물에 집착한다. 체지방을 분해해서 만든 케톤체를 에너지 공급원으로도 쓸 수 있지만, 탄수화물 중에서도 소화와 흡수가 빠른 단당류 섭취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식사 때를 건너뛰기만 해도 ‘당 떨어진다’는 말을 하며 피로하고 초조해 자꾸 입에 무언가를 넣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뇌의 잘못이다. 내 몸에는 비상식량으로 쓸 에너지가 충분한데도 뇌는 그걸 끌어다 쓰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바로 입안으로 넣어달라고 우기는 것이다.

이기적인 뇌가 보내는 거짓 신호를 무시하라
이런 상황을 ‘이기적인 뇌’ 이론의 지지자들은 ‘뇌 당김이 몸 당김을 이겼다’고 표현한다. 이럴 때 다이어트는 실패하게 된다. 이미 몸 안에는 체지방 형태의 잉여 에너지가 넘쳐나고 있어도 뇌는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우긴다. 그것도 특히 살찌기 좋은 단당류를. 이기적인 뇌의 진짜 무서운 점은 한 번 이렇게 방만하게 에너지를 끌어다 쓰게 되면 그 경향이 심화, 악화된다는 것. 그렇다면 다이어트에 성공하려면? ‘몸 당김’ 현상을 만드는 것. 몸이 뇌가 보내는 거짓 신호에 저항하며 에너지를 끌어 쓰게 하는 거다. 바꿔 말하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체지방 분해가 원활히 이뤄지는 체질로의 전환이다. 과연 어떻게? 우리의 몸을 도와 뇌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당분 디톡스 섭취하는 당분의 양을 제한해 보도록. 괴롭겠지만 그래도 단식이나 절식보다 견딜 만할 것이다. 식사 패턴의 변경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아침에서 점심 식사까지의 시간은 짧고 점심에서 저녁 식사까지의 시간은 길다. 더 나쁘게는 아침을 굶는 경우도 다반사. 이런 불규칙한 식사 패턴은 뇌를 더욱 굶주리고 이기적으로 만든다. 식사와 식사 사이의 텀을 일정하게 맞추도록 노력하자. 아침을 굶지 말고 점심과 저녁 사이에 설탕이 빠진 가벼운 간식을 추가한다. 만약 아침을 거를 수밖에 없다면 점심 전에 간단한 간식을 챙겨 먹는 것도 좋다. 그리고 저녁을 조금 늦게 먹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저녁 식사와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면 오히려 야식을 먹게 되니까. 제일 나쁜 것은 온종일 굶다 저녁에 폭식하는 것. 이런 식의 식사에 적응한 뇌는, 더 많은 당분을 요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언제 또 에너지를 흡수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운동 몸 당김은 몸의 신진대사가 활성화돼 있을 때 강력해진다. 몸이 뇌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한다. 그러니 운동을 시작하라. 운동 직후에 허기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뇌 당김'은 오히려 줄어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기적인 뇌’를 길들여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할 수 있도록 해 보자.

WRITER 남세희
EDITOR 김미구
PHOTO GETTY IMAGES/멀티비츠
DESIGN 하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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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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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리스트

초보
  • 에나원
  • 06.22 23:44
  •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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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
  • 콩콩새
  • 06.19 20:46
  •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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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 je39
  • 06.18 21:43
  • 왜 굶어서 빼면 안되는지 명확하게 설명해주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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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 달이네정정이
  • 06.17 01:52
  • 올리신 글들 다 너무 유익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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