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욕, 억제한다고 억제되지 않는다!
진료실에서 환자 분들을 만나 보면, 식욕이라는 것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정신과 의사로써 이야기하자면, 식욕에 관여하는 뇌의 회로는 대단히 복잡하여 스프링을 누르듯이 억누른다고 해서 식욕이 억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이어트와 같은 절식을 하다 보면 식욕 조절 메커니즘의 오류로 인해 반동적으로 폭식이 나타나는 다이어트의 부작용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폭식증이 시작되면서 치료를 위해 병원을 내원할 때까지 스스로 극복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지만, 폭식증이라는 진단 자체가 자제력의 상실이기 때문에 일종의 음식중독으로 보고 중독에 따른 치료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식욕을 조절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비만 클리닉에서 식욕억제제를 복용하거나, 기타 다이어트 식품으로 절식과 폭식을 반복하다가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서 오는 경우도 꽤 있다.
식욕을 컨트롤하는 시상하부는 감정을 다스리는 중추신경계이므로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조절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식사하는 것을 조절하려는 강박 자체가 폭식증 환자를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정량을 먹도록 노력하며, 이를 식사일기로 기록하여 지켜나가는 것인데, 폭식이 있는 분들 중에서 강박이 심할 경우 다이어트를 하려는 노력 자체가 오히려 강박의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 거식과 폭식은 함께 공존한다?
정신분석가 칼 아브라함은 1916년 ‘신경성 허기(neurotic hunger)’라는 개념을 통해 정신분석적으로 폭식을 해석했다.
깊은 무의식 속의 불안과 내적 갈등이 공허함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 감정을 해결할 수 없을 때 ‘배고픔’으로 전환되어 먹는 행동을 통해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지금도 ‘정서적 허기(emotional hunger)’라는 개념으로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폭식증 환자들이 보고되었는데,그 때까지 대부분의 의사들은 폭식증을 거식증의 한 아형으로 여겼다.
만성화된 거식증으로 환자의 체중은 회복되었으나 폭식 습관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거나, 앞으로 거식증으로 진행하게 될 환자의 상태로 분류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식증 같은 급격한 체중 저하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절하기 어려운 심한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환자들이 존재했고, 거식증 환자보다 그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거식증 환자들과 달리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체중증가와 체형에 대한 집착이 더 강했으며, 대인관계에 예민함과 어려움을 느낄 뿐 아니라, 술이나 마약 등에 대한 의존 증상이나 성격장애가 공존했다.
또 거식증보다 발생 연령이 높고, 가족이나 본인이 비만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폭식증이나 거식증은 섭식장애에 속하는 서로 다른 진단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두 가지 질환은 드문 병이 아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13년 거식증으로 치료받은 환자는 1,905명, 신경성 폭식증으로 치료받은 환자는 1,597명이 된다.
이를 감안해도 거식증으로 수백 명, 폭식증으로 수천 명의 환자가 매년 치료를 받고 있고, 치료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환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 분명하다.
폭식증은 식욕이 넘치고, 거식증은 식욕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거식증 환자들이라고 해서 절대 식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식욕은 있지만 먹고 싶어하지 않고, 지나치게 말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뚱뚱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경우도 많다.
마치, 왜곡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왜곡되게 보는 것이다.
음식을 먹지 않고 열심히 운동하며, 먹더라도 바로 토하고 설사제나 변비약을 사용해서 먹은 음식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일반적인 영양실조와 달리 서서히 살을 뺀 것이기 때문에 빈혈 증상은 없고, 혈액검사도 대부분 정상범위에 있다.
피골이 상접했지만 일상활동은 다 하기 때문에 가족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기가 먹는 것은 거부하지만, 요리를 좋아하고, 레시피를 모으고, 음식을 만든 후 데코레이션하여 그릇에 예쁘게 담고, 음식을 잘게 쪼개는 것에 몰두하는 등의 음식과 관련한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음식을 먹는 것은 싫어하나, 음식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자신의 체중 변화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가지며 칼로리와 운동량 등에 박학다식하다.
∆ 폭식증, 이제 숨기지 마세요!
폭식증의 특징은 폭식을 하고 나서 구토를 위해 손가락을 자주 입속에 집어넣다 보니, 손등에 굳은살이 박힌다는 것이다.
환자의 손등에서 이런 굳은 살이 보이는 것은 폭식증 환자의 중요한 징후 중 하나이며, 이를 러셀 징후(Russell’s sign)라고 부른다.
결국, 너무 많이 먹거나, 먹는 것을 거부하는 이 모든 이상 식사 행동이 정신질환에 속한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주변에 친구나 가족이 이러한 러셀 징후를 손등에 보이고 있다면 이상 식사행동이 있는지 물어보고 치료를 권하길 바란다.
※ 칼럼제공: 서초 좋은 의원, 유은정 원장 (정신과 전문의)